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

Books 2009. 4. 30. 02:11

나에게 "유시민"이라는 사람은 두가지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나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책에서 약간은 달뜬 어조로 근/현대사의 사건들을 자신이 보는 각도에서 이야기해 주는 생각이 깨어 있는 아마추어 역사학도의 얼굴이며, 또 하나는 지난 정권의 실패한 정치인의 얼굴이다. 물론, TV 라는 매스미디어와 동떨어진 채 살고 있는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가 정치판에 뛰어들기 이전에 TV 에 비쳤던 얼굴은 알지 못한다.

그가 정치를 하는 동안 간간이 들리던 그에 대한 좋지 않은 평들과, 속된 말로 "네가지 없다"는 평들은 그의 저술물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나에게는 의외의 일로 다가왔으며, 한편 많이 의아해 하기도 했었으며, 실망하기도 했었다. 내맘대로 한 사람에게 기대를 했다가 실망을 하는 종류의 일이 참으로 헛되고 무의미한 일이며, 심지어 옳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최근 가카의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 거의 없어지더니 얼마 전 책을 내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호평 또한 접할 수 있었기에 한권을 구해서 읽어 보았다.

후불제 민주주의

<<네24의 이미지임>>


이 책에 주어지는 여러 사람들의 호평은 아마도 이 책이 사람들이 느끼는 현재의 시국에 대한 실망감과 좌절감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기에 대중으로부터 많은 공감을 이끌어 냈다는 데 기인하였으리라 짐작한다. 나 자신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굳이 지적하는 수고를 하시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정치가" 유시민이 아닌 "깨어있는 사람" 유시민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나는 참으로 반갑고 즐거웠다.

이 책을 읽고서 '우리나라의 헌법이 이처럼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서 좋았다' 라든지, '헌법에 대해 재조명했다' 라든지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의 전반부의 매력은 헌법에 있는 국민의 여러가지 기본적인 권리들과, 명기해 두고 있는 법제장치 등을 유시민만이 할 수 있는 것 처럼 보이는 특유의 시각에서 현재의 우리나라의 시국과 절묘하게 비교되게끔 기술해 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글로써 적어 내는 것은 어렵다.) 다시 말하자면, 책에서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는 헌법에 "그러한 내용도 들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 보다는, 유시민선생의 글들에서 드러나는 그의 사물을 보는 시각을 확인할 수 있어서 얻는 즐거움이 나에게 있어서는 더 컸다는 이야기이다. (무슨 말인지... -_-);;


유시민선생(그렇다, "선생"이라고 감히 칭해도 되겠다)이 서문에서 책의 이름을 "후불제 민주주의" 라고 짓게 된 이유를 밝혔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붙일만한 참으로 적절한 수식어가 아닐 수 없다. 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후불제"인지는 누구나 잠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터, 굳이 여기서까지 설명하지는 않겠다. 책을 한권 구해서 읽어 보시면 되겠다.


책의 전반에 걸쳐서 느껴지는 문체는 예전의 "거꾸로..." 에서의 선동적인 것이 아니라, 실패의 쓴 경험까지도 자기 안에서 성공적으로 융화시켜 내어서 더 깊이있는 사람이 된 인물이나 보여 줄 법한 상당히 차분한 문체였던지라, 오히려 더욱 더 호소력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언뜻언뜻 비치는 정치인이었던 시절의 회한(?)을 이야기하는 부분에는 쓸쓸함까지도 묻어나 이 사람이 예전의 그 유시민인가 하는 생각까지도 들게 했다. 역시 고난과 시련, 그리고 실패의 고배는 사람을 한층 더 담금질하여서 성장시키는 모양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책은 유시민이 가진(가지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열려 있는 사고방식과 눈을 통해서 본 사회 현상을 기술한 글이기 때문에 읽는 내내 즐거웠으며, 나도 그와 같은 "개방된 마음" 을 가져야지 하는 생각도 하게 만들었다. 또한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여지껏 살아 오면서 견지해 왔던 태도들과 언행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끔 해 주는 부수적 효과도 발휘했다.


아마도 이러한 종류의 글을 읽는 목적은 글을 읽고서 마치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가 대신 말해 주는 것인 양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저자가 대신) 정리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의 즐거움과,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공감"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즐거움을 충분히 선사해 준다.

물론,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 또한 비판적인 시각에서 읽어야 하겠지만, 솔직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 또한 편향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우연히 저자의 시각이 내 시각과 일치하는 면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 살면서 현재 시국을 개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가 생긴다면, 청소년기에 사물을 보는 균형잡힌 시각 형성에 도움이 되도록 반드시 읽어 보도록 권할 책들의 목록 중에 홍세화선생의 책과 함께 이 책이 들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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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필에 횡설수설이다.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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