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소 지향의 일본인 / 이어령

Books 2011. 3. 9. 00:22

내가 처음으로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일본론' 이라는 류의 서적을 읽은 것은 군대에서 읽었던 '나는 일본 문화가 좋다' 이다. 당시 갓 인터넷이 널리 퍼지고 있었으며, 암암리에 어둠의 경로로 어렵게 구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동영상을 보고서 한참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이 새록새록 피어나던 시기였던지라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어 내려갔던 기억은 있지만, 정작 지금은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도 내 책장 한구석에 있을 터이지만, 다시 빼 내어 읽을 생각은 없다.

그 다음 읽었던 일본 관련 서적은 전여옥이 쓴 '일본은 없다' 이다. 이 역시 지금은 그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일본을 폄하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읽으면서도, '이 사람, 무슨 일본에 열등의식 같은 게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거기 더해서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싫어하고 있는 '애국'과 '국수주의',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근거 빈약한 주장까지 더해져 상당히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었다.

'일본은 없다'를 읽고서 느낀 실망 때문에, 그 이후로 줄줄이 쏟아져 나온 '일본은 있다', '일본은 있다 없다를 넘어서' 와 같이 무슨 어린아이들 말장난 하듯 이어지는 시리즈의 책들을 한권도 읽지 않았다. 그 책들도 모두 초라한 민족주의와 피해의식에 호소하는 영양가 없는 내용에 불과하리라 섣불리 짐작해 버렸기 때문이다. 일본 관련 서적에 편견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거의 10년이 지난 2010년, 읽을 거리를 찾아서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는 의외로 이어령 교수의 1982년의 저작물에 눈이 가게 된다.


'축소 지향의 일본인' ---> 네24 링크


원제 「縮み」志向の日本人 ---> 일본 아마존 링크
참조 : 이어령 교수에 대한 일본어 위키피디아 : http://ja.wikipedia.org/wiki/%E6%9D%8E%E5%BE%A1%E5%AF%A7
책의 표지 사진은 각각 yes24, amazon 에서 가져온 것임.


우선, 저자가 전여옥씨는 감히 명함도 들이밀지 못할 이어령교수라는 점,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고, 영역, 불역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최근 일본어를 좀 배워서 일본에 대한 흥미가 많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는 점에서 책을 주문하였다.


대학시절에야 책을 한권 잡으면 다 읽을 때 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었는데, 먹고 사는 일에 바쁜 요즘은 한권을 잡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띄엄띄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달랐다. 저녁 먹을 무렵에 책을 읽기 시작해서, 다 읽고 보니 동틀녘이었다.


우선, 저자의 시각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또한, 일본 사회의 집단 무의식이라고나 할까, 일본인의 대개의 경향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러한 특징들을 '일본어'에서 찾았다는 점이 또한 마음에 들었다. 언어와 생활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고, 사고는 또 언어를 지배하고, 언어에 지배당하는 사고는 개개인의 행동방식, 대인관계, 집단생활 등,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설명을 하지 못하겠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엽의 구조주의 철학(언어학)에서부터 비트겐슈타인까지의 철학사의 개요만 읽어 보아도 언어와 인간 삶의 관계에 대해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니 '말'과 '인간사'의 관계는 그에 관련된 책을 읽어 보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겠다.

아무튼, 이어령 교수는 '일본어' 에서 일본인의 대개의 사고 방식과, 일본 사회의 모습, 일본 경제의 흥과 망(?), 일본 문화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공통점 (위대한 지성들은 어디서든 공통점, 유사점을 찾으려고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거나 들었다) 에 대해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을 21세기 초에 전여옥이 쓴 '일본은 업ㅂ다'와 비슷한 시기에 읽었다면, 지금처럼 재미있게 느끼진 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지금 일본어를 어느 정도는 할 줄 알며 (JLPT N1 정도는 될 터), 수많은 일본 드라마, 애니메, TV 방송 및 직접 상당한 시간동안 대면하고 지냈던 일본인을 통해 일본에 대한 나름의 기초 지식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을 읽으니 '아하,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라며 무릎을 치며 책을 읽어 내려갈 수 밖에 없다.


물론, 이어령 교수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시한 모든 것들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언어의 단면만 보고서 섣불리 판단했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보이고, 근거로 제시한 자료 또한 조사가 불충분한 부분이 눈에 띄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일반론을 펼치기 위해 잡은 출발점이 바로, 그 집단이 사용하는 '말'이라는 점. '말'에서 출발하여 '말'에만 한정되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여러 부분에까지 논리를 펼쳐 나갔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이 아주 좋다. 즐겁게 읽었다는 말이다.


다음에 읽을 책도 이어령 교수의 책으로 해야 겠다. 벼르고 벼르다 아직도 구입하지 않았던 '한국인의 신화' 로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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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졸렬한 내 짤막한 이 글을 보고서 이 책을 읽어 보려는 생각이 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란다. 일본어에 대한 지식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이 책의 재미는 두 배 이상으로 차이가 난다. 내가 일본어를 잘한다고 젠체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한국어판으로 2002년에 옮겨 적으면서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좋게끔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보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이 보였다. 일단,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독서를 시작할 것을 일러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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