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이민도 알려줄께 1

Australia 2008. 8. 19. 03:14
딴지일보 쪽에 연재(?) 되었던 기사인 듯 한데, 그 내용이 심히 알차고 생동감 넘친 데 반해 사이트 자체의 존폐 위기가 느껴지는 바 심히 불안하여 기록 보존의 차원에서 여기에 통째로 복사해 둔다.

원 글 url :
http://newreview.nomad21.com/default.asp?insPage=over&mode=gView&city_code=AUZ&which_kind=lnk&pid=215







미국 이민 기획기사가 나간 이후, 남태평양 너머 호주 특파원으로부터 이런 항의가 있었드랬다. "한국 사람이 미국으로만 이민 간다던? 호주도 있따!!"


그래서 그랬다. "누가 뭐래던? 그럼 니가 써재껴라"

그랬더니 "알아따" 그랬다.

그래서 호주 이민도 기획연재도 시작한다. 참 잘했지?

미국, 호주에 이어 카나다든 아님 또 딴 나라든 먼저 보따리 싼 선배들이여. 입이 근질 거리걸랑, 참지 말고 관광청에 멜 뿌려주시라. 서로 돕고 알켜줘야 글로벌리제이숑한 대한민국, 빨리 온단다. 글취?

아, 글구, 이민이 먼 자랑이라고 딴지에서 기획연재를 하냐고 화내시는 분덜아. 갈넘들은 가는거구 안갈넘은 안가는거다. 코딱지만한 땅에서 바글바글 거리고 산다고 장땡이더냐? 이민에 잘난척도, 죄의식도, 비판질도 다 촌스럽다. 딴 나라에 가서 살 팔자로 태어난 넘들이, 선배들에게 조언을 받는 의도로 이해하기 바란다. 오케이?

- 관광청장-




그다이 마잇!


이게 무슨 이빨 빠진 할마시 고기 씹는 소리냐구?


그게 아니고 'Good day, mate!' 이라는 호주의 가장 대중적인 인사말로 니덜이 호주 공항에 도착하면 아마도 제일 먼저 듣게 될 말일 게다.


mate 는 우리 말로 친구 혹은 동무라는 뜻인데, 얘네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아무에게나 동무, 동무 하는 걸 보면 혹시 호주가 빨갱이 나라가 아닐까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다(빨갱이들이 즐겨쓰는 '동무'라는 말은 'comrade' 라고 한다).


물론 한 때 노동당 정권이 꽤 오랫동안 호주의 권력을 장악한 적은 있었드랬다. 그치만 최근의 10 년을 보면 자본주의 원칙을 충실하게 따르는 존 하워드 수상의 자유당과 국민당 연합정권이 훨씬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상하원의 의원수에서도 우세하다.

참고로 호주는 아직도 영국 여왕 폐하의 충실한 식민지로서 얼마 전에 공화국으로 갈지 영국 여왕 폐하의 충실한 하인으로 남을지에 대한 투표를 했었는데 하인으로 걍 남기로 했었다. 뭐 문서상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 영국이 호주에 대해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라고는 개뿔도 없다.


아이구, 할 말이 많다 보니 내 소개도 안하고 엉뚱한 소리만 늘어놨다. 베리가 쏘리하다.

본인은 격동의 70 년대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출생한 현재 만 30 세의 신체 건강한 남자로서 한 때 진정한 바른생활 애국우익청년으로 이 조국에 한 몸을 바치려 했으나.. 여차저차 저차여차해서 호주시민이 되어버린 Sammy 라는 넘이다.


여차저차 저차여차한 사연이야 니덜이 알고 싶지도 않을 테고, 알아 봐야 신파극 밖에 안될 테니 그런 거는 글 중간중간에 맛베기로 밝히기로 하고, 하여간 본인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호주 유학 = 이민 = 취업' 이라는 주제로 수 차례 특강을 하고자 한다.

공치사 하는 거 같지만, 니덜 호주에 관한 이런 정보 암데서나 얻을 수 있는 거이 아니다.

양키고홈이 어쩌고 부시를 죽일 놈이네 살릴 놈이네 해도 사람들은 이민하면 미국을 떠올리고 신문광고나 기사 등에서도 미국 이민만 떠들어대지 실상 호주 이민에 대한 자료와 정보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혹자는 호주가 백호주의로 동양인의 이민을 막기 때문에 그렇다고들 오해 하고 있지만 그건 전혀 아니올시다다. 본인의 경우 호주입국 딱 1 년 반 만에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되었고, 그 후로 6 개월 뒤에 영주권을 받았으며, 또 그 후로 2 년 만에 시민권을 받으며 호주 국민이 되었다. 즉 최초 호주에 입국해서 호주 국민이 되기까지 4 년 반이 걸린 것이다. 사실 영주권만 받으면 이미 호주에서는 시민권자와 거의 동등한 위치이므로 정확히 1 년 반에서 2 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한다면 호주 정착은 무리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봐도 좋다.


생각보다 절라 쉽고 빠르지 않은가? 그렇다면 호주는 왜 일케 가슴을 화알짝 열고 외국인들을 받아들일까? 그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호주는 이미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셨다. 즉, 젊은 피가 없으면 이 노땅 국가의 장래도 비실비실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딴 나라 젊은거뜰을 끌고 와서는 일거리도 주고, 정착도 시켜주고, 영주권도 주고, 기타 사회복지지원도 마구 해주는 것이다. 그래야 오리지날 호주 노인네들이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있을 테니까.. 여하튼 이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벌써 마구 호주로 튀어 오고 싶으신가들? 어허.. 넘 서두르지 마시라. 오더라도 본좌의 특강이나 잘 듣고 오시라. 앞으로 전개될 본좌의 특강 순서는 담과 같다.


1.   탈출기  

2.   왜 호주유학을 선택하는가?

3.   호주 유학생독립기술이민 총정리

4.   호주 현지 취업의 비법


오늘은 그 첫순서로 본인이 어떤 과정들을 거쳐서 대한민국을 등지고 호주로 탈출하게 되었으며 어떤 식으로 호주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썰해드리게따.
 



아무래도 여차저차한 본좌의 히스토리부터 공개해야 할 듯하다. 생생한 도큐멘터리적 사실감과 본좌를 통한 독자들의 시뮬레이숑을 위해 이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격동의 70 년대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2 남 1 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거주지는 강남이었고 아버지의 오래된 숙원으로 강남 K 고교에 입학하여 3 년 연속 부반장 완장을 차며 학교를 졸업했다. 내신은 1 등급이었다. 갑자기 절라 잘난척 하는 느낌드는데 그런 생각 나한테 없으니 니네들도 갖지 마시라.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


고등학교 시절을 바른생활로 보내고서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다. 신림동 S 대학, 그 곳에서도 지성의 최후 보루라고 자칭하는-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인문대학의 모과에 입학을 하였다.


당시는 변화의 90 년대 초반이라서 학교가 온통 드러내놓고 빨갱이를 자처하는 학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새빨간 학우도 있고 붉그스레한 학우도 있었고 반면에 나처럼 회색인 학우도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붉은 계통의 학우가 더 많았다.


아무튼 당시의 대부분 회색분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역시 이꼴 저꼴이 싫어 아예 학교를 멀리 하기 시작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4 년 만에 턱걸이 졸업을 하여 바른생활 애국우익청년의 보증수표인 KS 마크를 획득하고야 만다.


거기다가 KS 마크도 모자라 학군장교(ROTC)로 지원하여 3,4학년 방학 때마다 좃뺑이친 덕에 졸업과 동시에 10 만 광촉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임관 후 처음 간 곳은, 당시 국민에게 삥 뜯은 세금에서 자기들끼리 일부는 이미 쓱싹 챙기고 나머지로 대충 엉성하게 만든 상무대라는 곳이었는데 아무튼 여기서 보병소대장 교육을 받았다. 발령받은 곳은 수도권의 안위와 직결되는 경기도 북부의 최전방 육군 모사단. 이 곳의 한 보병대대의 소총소대장으로서 부임하였는데 자대에 가자마자 수해가 나서 졸라 좃뺑이를 치게 되었다.


난 군대가서 배우고 깨달은 것이 좀 많은 편인데, 여기서도 너무나 중요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자각하고야 만다. 왜 대한민국 육군의 최전방 보병대대에는 서울 시내에 빨빨거리면서 히히덕 돌아다니던 그 수많은 대학생 놈들은 거의 없고, 죄다 돈 없고 빽 없는 깡촌놈들만 모이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서 바른생활 애국우익청년은 그냥 빡 돌아버릴까 했으나 그래도 조국 대한민국에 등을 져야한다는 생각까지는 안했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내가 태어나서 자란 대한민국을 등지게 된 결정적 동기는 98 년 초반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터진 IMF 라는 사건이었다.


꺽어진 50 년을 조국 대한민국이 시킨대로, 또 교과서에서 시킨대로 살아온 나에게 국가가 해주는 것이라고는 쥐꼬리 같은 군인 월급을, 또 한 끼에 천 원 남짓하는 군바리 밥 값을 IMF 의 고통을 같이 해야 된다는 이유로 깍는 것 밖에는 없었다. 전역 후 살아갈 길이 아무리 막막해도, 그동안 바른생활하고 애국해왔던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나에게 보장해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드디어 자각해버렸다. 나는 이 때부터 대한민국을 등질 방법을 군대에서 배운 전술적 결심 수립절차에 따라서 단계별 '대한민국 도피 및 탈출 계획'을 그냥 세워버리고 만다.


다행히도 술, 담배를 원래 안하는 타고난 체질과 연일 계속되는 일직근무와 교육훈련 덕에 부대 인근 동네 다방과 단란주점 아가씨들에게 눈길 한 번 줄 시간이 없었다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정말 본의 아니게 군생활 동안 쥐꼬리 같은 월급이나마 짭잘하게 몽땅 모을 수 있었다. 바로 이 돈이 호주에로의 탈출작전에 쌈짓돈이 되고 만다.


당시의 영어실력을 회고해보면, 앞에서도 고백했듯이 학업을 멀리한 탓에 남들은 취직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너도 나도 준비하던 TOEIC 이 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아예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제대하자 마자 출국까지 2 주간의 여유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 배웠던 기본적인 문법과 단어들을 나의 필살기인 단기간의 암기주입법으로 한 번 외어보려했으나 이미 나의 머리는 이 필살기를 소화하지 못하는 화석이 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허접한 영어 실력으로 싸구려 완행 비행기 티켓을 쥐고 떠난 나는 일본 오사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는데 공항 게이트 앞에서 일본 여직원과 의사소통이 안되서 개망신을 당한다. 다시 한 번 영어로 좌절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각오을 다지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호주 시드니에 도착하였다. 드뎌 탈출해버리고 만 것이다.
 



처음 도착해서 약 3 개월 간은 정말 고등학교 3 학년 때로 돌아온 듯이 영어공부에 매진하여 영어연수 10 주 만에 딴지일보 해외접속률 교육기관 부분 1 위를 차지하기도 했던 호주 시드니에 위치한 The University of New South Wales 라는 곳의 경상대학원 입학 허가를 받게 되었다.


여기서 놀란 사실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갔었다는 대학에서 4 년 동안 가르치는 것들보다도 호주의 정규과정도 아닌 그냥 대학교 부설 영어학교의 교과과정이 훨씬 더 충실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 10 주 동안 나는 생각하고 발표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방법들에 대해서 요약정리를 할 수 있었다. 내가 단언하건데 오늘날의 나를 형성한 것들 중에서 한국에서의 대학 4 년은 정말 보태준 것이 개뿔도 없다. 오히려 나를 좃뺑이 치게 만든 군생활과 호주에서의 유학생활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드디어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 학기 초반의 강의들은 도대체 교수가 어디까지 진도를 나가는지 옆 학생의 눈치를 봐야 겨우 알 수가 있었다. 예습과 복습이 없이는 도저히 교수의 강의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거의 학교 도서관에서 교재와 씨름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1 학기에 이수해야 할 과목수가 한국처럼 많은 편이 아니라 겨우 3 과목이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따라갔고 1 학기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여기서 기말고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내가 다녔던 학교는 시험감독이 가장 까다로운 학교 중의 하나로, 같은 과목의 수강생들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반드시 동시에 시험을 쳐야했다. 경제학 같은 경우에는 당연히 수강생이 많은 과목인데 이 많은 수강생들을 한 번에 한 장소에 모아 놓기 위해서 주변의 한 경마장 연회실 같은 곳에서 시험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험에 교수나 조교들이 시험 감독을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섭외를 했는지 은퇴한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시험 감독을 들어오는데 시험시작 전에는 너그럽고 인자해보이던 그 얼굴에서 시험시작 신호와 함께 얼굴에 찬 바람이 부는 것이었다. 컨닝 비스무리한 것만 해도 바로 불러내서 주의를 주고 수차 경고를 했음에도 말을 안들으면 바로 시험지와 답안지를 압수해 버린다.




또 한 가지 시험에 대한 기억이 나는 것은 바로 답안지인데, 당연히 시험은 주관식이고 이에 대한 답안을 쓰는 답안지가 대개 24 장 짜리 공책이다. 어떤 때는 48 장 짜리 공책을 주기도 하는데 어떤 썩을 년놈들은 이 답안지를 두 개 세 개씩 받아가서 그걸 다 채워서 제출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아는 단어를 다 열거해도 24 장 짜리 공책 한 권을 채우기가 힘들어서 경제학 같은 경우에는 내가 아는 그래프나 표까지도 다 그리고 색칠하고 뭐 그랬었다.


여차저차하여 드디어 1 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좃도 아닌 영어실력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뭔가 된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 군대에서 배운 걸 다시 확인한 것이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전두환 아찌가 만들었다는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 등등의 말은 아직도 나에게는 유효하게 들린다. 그리고 넘버 쓰리의 송강호 마저도 부르짖은 '안되면 될 때까지...' 이런 류의 무대뽀 정신이 삶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님 말고.


아무튼 이 여세를 몰아서 방학 동안의 무료함도 달랠 겸 떨어진 유학경비를 마련코자 현지 한인 교포 업체에 취업하여 현지 직장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대단한 업체도 아니었고, 월급을 많이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아무리 사소한 경력이라도 다음 취업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주변 동료들의 조언과 실제로 구인광고를 봐도 항상 학력제한은 없어도 경력제한은 꼭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러한 직장생활 역시 하나의 학과정으로 인식하고 일을 하였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고 2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계속해서 교포업체에서의 일과 대학원에서의 학업을 병행하였고 첫학기를 무사히 넘긴 자신감으로 2 학기도 무사히 끝날.. 무렵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쯤이면 한 번 현지 외국기업에 지원해 볼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즉 간땡이가 배 밖으로 나오는 발상을 하고 만다.


그래서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덜컥 미친 척하고 어느 헤드헌팅 업체에 이력서를 넣어 보게 되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영문이력서를 제출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그 헤드헌터가 머리가 돌았는지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다. 마침 나의 이력서를 마음에 들어하는 다국적 기업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이 헤드헌터와의 1차 면접을 무사히 통과하고서 한 미국계 다국적 기업을 소개 받게 된다. 곧이어 실제로 채용하게 될 해당 기업체의 인사담당자와 널널한 2 차 면접도 무사통과. 그 인사담당자는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영국계 호주인이었는데 얼마 후 여자친구와 하와이로 휴가간다고 들떠 있어서 자기만 혼자 열심히 떠드는 통에 어렵지 않게 면접이 끝났다.


마지막으로는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오게 생긴 그러나 미모는 니콜 키드만을 닮은 나의 직속상관이 될 여자 매니져와 최종면접을 보게 되었다. 이 여자는 자기자신의 실적이 자기가 뽑는 밑의 직원과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까다롭게 나를 면접하였다. 대개 외국의 기업들은 대체로 그러한데 모든 주요업무가 자기자신의 실적, 즉 연봉과 밀접하게 얼켜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 미녀 매니저가 나를 채용해서 내가 일을 잘하면 그 매니져는 실적을 인정받고 그 해 연봉을 많이 받거나 이듬해 연봉이 올라가거나 하고 그 반대이면 바로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그러니 직원을 뽑을 때 혈연, 지연, 학연 등은 눈꼽 만큼도 작용하기 힘들고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검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슨 대학 졸업장이나 자격증 보다는 바로 전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하였고 그 일의 실적이 어떠했는지가 가장 중요한 키 포인트이다.


나의 경우 한인교포업체에서의 업무와 실적을 잘 포장해서 어필한 결과.. 합격하였다.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나 자신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당시 한국인이라고는 전무한 그 회사에 처음 출근했을 때의 그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한 성취감의 그 어떤 느낌이라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불행하게도 그 미녀 매니져는 속썩이는 남자친구 땜에 마약에 손을 대고 뭐 그러다가 내가 입사한 지 2 주일 만에 사표를 내고 사직하게 된다.


그렇게 되도 않는 영어실력으로 직장생활과 함께 대학원 2 학기를 마친 후 그 동안의 과정만으로 학교에 별도의 학위를 요청한 후 이를 가지고 영주권을 신청하게 된다. 여기서 어떻게 1 년만에 무슨 학위를 주냐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 왜 한국식 혹은 미국식 교육제도만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시는가? 호주에서는 학사 학위도 3 년 짜리부터 6 년짜리까지 있고 석사학위도 1 년 짜리부터 2 년 짜리까지 다양하다. 논문을 쓰는 학위도 있고 논문이 없는 학위도 있다.


영주권 신청 후에도 일과 공부를 계속 병행하였고, 대학원 3 학기가 끝날 무렵 드디어 호주 영주권을 취득하게 된다. 대학원 3 학기와 4 학기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에 매진하였는데 이게 가능했던 것은 나인투파이브(9 to 5)의 칼출근, 칼퇴근 시스템과 이미 글로벌스탠다드인 주 5 일 근무, 그리고 년간 1 개월의 휴가, 2 주 가량의 별도 병가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주는 내가 보기에는 정말 노동자의 천국이다. 대한민국의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nothing to loose 인 분들은 대한민국에서 수구꼴통들에 맞서 아웅다웅하면서 뻘짓거리하지 마시고 다 호주로 오시라. 내가 계산을 해보니 일년 365 일 중에 약 2/3 정도인 220 일만 일을 하면 된다. 사실 이런 정도는 호주 뿐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진국 (developed country) 에서는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분은 왜 대한민국도 선진국과 대등한 경제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이라고 불리워지지 않고, 오히려 후진국이라고 불리우지 않는 게 다행인지 묻는다면, 바로 이러한 사회적, 제도적 시스템의 후진성에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역시 아님 말고.


영주권 취득하고 대학원도 졸업한 후에는 다른 더 좋은 업체가 없나 하고 10 군데 이상의 다국적 기업들에 지원을 해보았는데 대부분의 경우 모두 환영해주었다. 하지만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 나의 능력을 너무 인정해주는 바람에(눈 낮은 거뜰..) 처음 입사한 회사에 꾸준히 근무하여 벌써 4 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여기서도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호주에서는 본인의 능력에 따라서 노동자(employee)라도 고용주(employer)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능력있는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에게 자기 자신의 몸값을 배팅하도록 요구한다. 맘에 안 맞으면 다른 회사로 언제든지 이직할 수 있고 심지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경우는 다른 나라로의 이직도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실제로 내가 근무하는 곳을 보면 뉴질랜드에서 온 직원도 있고 미국에서 온 직원도 있으며, 회사를 그만두고 영국으로 취업하는 직원도 있고 같은 회사의 싱가폴 지사로 옮기는 직원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과정에서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한국인이 느끼는 국가간의 이주장벽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요즘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대해서 한국에서도 말이 많은 것 같은데, 호주라는 사회에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반드시 노동자에게 불이익이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님 말고.



호주로 온 지 한 해 두 해를 넘기면서 나 역시 이민 1 세대를 벗어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이 곳 생활이 조금씩 지루하고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료한 일상을 달래고자 현지 모 로스쿨에서 호주 이민법 과정을 등록한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이민법무사 (Migration Agent) 자격증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 공부를 하게 된 동기는 나 스스로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만으로 만족을 못하고 내 동생들 친척들 부모님들도 호주로 전향시켜버리겠다는 공작을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지 심심하게 혼자 놀지 않고 가족들하고 같이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도움이 되어서 그 과정을 수료하여 이민법무사 등록을 하고, 현재 두 명의 동생들은 영주권을 받기 위한 일단계 절차로 호주대학원에서 공부중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별로 돈 쓸 곳이 없는 불쌍한 총각이라 또 본의 아니게 은행에 저축한 돈이 많아졌다. 정말 내 부인이 누가 될지 좋겠다. 아무튼 그 돈을 은행에 넣고 있어봐야 이자도 얼마 안주는 거 차라리 싼 이자로 돈을 빌려서 집을 사기로 결정을 했다.


그래서 동생들은 내가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엄마, 아빠에게 조금 삥 뜯은 돈과 은행대출을 받아서 시드니 시내 가까운 곳에 새로 지은 침실 3개 화장실 2개 짜리 아파트를 구입하게 되었다. 대단한 고급은 아니다. 그냥 아파트 단지 내에 실내수영장, 스파, 사우나, 짐 정도가 있고 아파트의 courtyard(한국말로 베란다)에서 족구경기가 가능할 정도이다. 말하고 나니 졸라 고급인 거 같다. 여기선 고급 아닌데...


이왕 시작한 이야기니까 차 이야기까지 해보겠다. 호주에서 차는 총 3 대를 몰아봤는데 호주에서의 첫차는 마즈다 929 V6 라는 일제 고급차의 중고를 몰았었다. 꽤 낡은 차였음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성능의 차였다. 두 번째 차는 대한민국 출신의 바른생활 청년의 정신을 다시금 되살려 볼까하고 공장에서 바로 나온 대한민국의 대표 자동차 하윤다이 그랜듀어 엑스쥐 V6 3.0 을 구매하였다. 그러나 약 1 년간 사용해 본 결과 차가 하도 그지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냥 막내동생 줘버렸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렉서스에서 가장 비싼 모델을 드라이빙하고 있는데, 새 차를 산 건 아니고 또 중고차로 샀다. 근데 왜 20 세기에 나온 그 중고차가 왜 21 세기에 새로 나온 한국차보다도 더 좋은지 졸라 안타까울 뿐이다.


드디어 2003 년 1 월 26 일 호주건국기념일.. 이 날 나는 호주의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태어나면서 타고난 국적이 아닌 내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한 일이며 동시에 무언가를 쟁취했다는 느낌 때문에 너무나 만족스럽다.


이상 본인의 탈출부터 정착까지의 일들을 요약 정리해보았다. 자랑하냐고 배 아파할 독자는 배 아파하고, 좃도 아닌게 까부네 하고 비웃을 사람은 열심히 비웃어 주길 바란다. 다만 탈출에 관심있는 동지들만 앞으로 귀를 기울이시라. 다음 번에는 '왜 호주유학을 선택하는가' 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루고자 한다.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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